죽어 천 년을 살리라(259)
안중근이 예수 수난일인 3월 25일을 원했음에도 굳이 다음 날인 26일로 사형 집행이 밀린 것은 이른바 상월명일(祥月命日)의 미신 때문이라고 알려져 왔다. 곧 그렇게 하는 데는 이등박문이 죽은 날과 같은 달은 아니어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안중근을 죽여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뜻이 있었다. 그런데 뒷날 발견된 일본 측의 기록은 다르다. 3월 25일은 순종황제의 생일인 건원절(乾元節)이라, 그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나라 안팎으로 분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어, 통감부에서 다음 날로 미루어 달라고 요청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사형집행을 10시에 시작하고, 절명 확인 시각을 이등박문이 숨진 10시 15분에 맞춘 것을 보면 그동안 전해 내려왔던 세간의 정설이 더 맞는 듯하다. 비록 10월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만, 죽은 날과 시각이나마 26일 10시 15분으로 맞춰 이등박문의 그것과 같게 하려고 애쓴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설령 건원절을 핑계 삼은 통감부의 요청이 있었다 해도, 그것으로 일제의 좀스럽고 속된 국량을 다 가리지는 못한다.
사형 집행이 있던 날 아침 안중근은 평소와 다름 없이 일찍 일어났다. 태연자약하게 양치와 소세를 하고 형무소의 일등 관식(官食)으로 아침밥을 먹은 안중근은 마침 당직을 서고 있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를 불러 말했다.
"전일에 당신이 부탁한 글 한 폭을 써보도록 합시다. 오늘이 아니면 더는 그렇게 할 틈이 없을 듯싶소."
▲ 일러스트 김지혁 지바 도시치는 일본군 헌병 상등병으로서 하얼빈에서부터 안중근을 호송하는 임무를 받고 따라왔다가 여순 형무소 간수로 눌러앉게 된 사람이었다. 지난번 당직 근무 때 지바가 가만히 안중근의 독방을 찾아와 말했다.
"안 선생, 일본이 선생의 나라 독립을 위협하게 된 것은 정말로 미안한 일이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사과드리고 싶은 심경이오."
그 말을 들은 안중근이 감격하여 지바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지바씨, 그 말에 가슴이 찡하오. 일본 사람 특히 군인의 신분인 당신으로부터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된 것은 뜻밖이오. 역사의 흐름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오. 전에 말한 바와 같이 한국과 일본이 이렇게 불행한 사이가 된 것도 이등박문 한 사람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르겠소. 또한 나의 이번과 같은 행동으로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일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이 머지않아서, 아니 어쩌면 먼 훗날에 있을지도 모르나, 우리 한국 동포의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소. 나는 특히 나의 뒤를 이을 조국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굳게 믿고 있소."
"그래도 내가 일본의 군인, 특히 헌병이기 때문에 선생과 같은 훌륭한 분을 중대 범인으로 다루며 간수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 매우 괴롭습니다."
지바가 그렇게 받는 말에 다시 안중근이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아니오. 당신은 군인으로서 당연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오.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것도 대한의병대 참모중장으로서 내 임무를 다하기 위함이었소.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일단 유사시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 본분이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자기의 임무에 최후까지 충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자 지바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품에서 흰 천 한 폭을 꺼내 들었다.
"안 선생, 여기 비단 한 폭을 준비했으니, 저를 위해 무언가 한 구절 써주시지 않겠습니까?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도 태연자약하게 감옥 안 여러 사람에게 휘호를 써주시는 모습이 실로 천신(天神)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은 지바에게 호감을 느껴도 그날은 별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아 미루어 두었는데, 사형 집행이 있는 날 아침 당직인 그를 보고서야 그 일을 떠올린 것이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안중근은 지바가 두고 간 흰 비단에 단숨에 그 한 줄을 쓰고 '대한국인 안중근'이란 서명과 함께 단지동맹 때 무명지가 잘려나간 왼손바닥을 먹물에 찍어 낙관을 대신했다.(이문열의 소설 안중근의 불멸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