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원명칭, 세종으로 변경해 균형발전 상징되게 하자.
6개월 후면 대한민국 균형발전의 상징인 세종시가 탄생한다. 1971년 대통령선거 때 수도이전계획이 처음제기 됐다. 김대중 후보가 행정수도를 대전으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1977년 2월 10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울시청을 순시해 시정을 보고받고 폭탄발언과 백지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다가 무산되었다.
30년 후인 2002년 9월 30일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선거공약으로 “수도권 집중억제와 낙후된 지역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와대와 정부부처를 충청권으로 옮기겠다는 행정수도 이전계획을 발표한다. 그해 12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신행정수도 이전계획이 추진된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헌법소원 제기로 위헌판결을 받아 다시 여야합의로 행정중심복합도시 특별법을 제정하여 추진되다가 이명박 정부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실을 맺는다.
백지계획에서 시작해 행정수도이전, 행복도시, 세종시 등 40여년의 우여곡절 끝에 오는 7월 1일 세종이라는 명칭이 특별법에 의해 정식 사용된다. 역대 선조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세종대왕에서 세종을 딴 것이다. 이를 지금까지 관철시키며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세종시의 관문역할을 하는 조치원이 국가균형발전의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치원이란 명칭유래를 찾아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잔꾀에서 나온 지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1931년 4월 1일 대전 광주 울산 전주 수원 등의 대도시와 같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나 다른 지역처럼 대도시로 발전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조치원에서 세종으로 가장 먼저 개명을 추진한 것은 고려대가 법적 다툼까지 하며 세종캠퍼스로 개명을 비롯해 조치원고가 세종고로, 그 밖에도 상가상호나 버스 등 세종 명칭을 많이 사용해 조치원이 세종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치원이 가장 먼저 읍으로 승격된 이유는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아지고 만나는 역중에서 가까운 평야의 읍이나 동쪽에 치우쳐 인접한 하천이 충북과 도계라 더 이상은 확장이 안 돼 도시로 발전되지 못했다. 역사를 서쪽의 넓은 지역을 고려해 지었다면 많은 발전했을 것이다.
거주민들은 세종시 건설로 공동화 현상과 균형발전 차원에서 세종시청 위치를 조치원에 두어야 한다며 갈등을 빚는다. 조치원에는 주민의 휴식공간하나 없고, 청주와 대전 공주 천안 등으로 생활이 분산되는 실정이다. 세종시 탄생으로 오송과 대전 정안IC 등의 진입도로 건설은 금년 중에 개통되어 서울과 대전 오송 등은 이용이 편리하도록 만들어진다.
정작 세종정부청사와 조치원간 노선확장공사는 5년 후인 2017년에나 착공예정이라 발전은 찾을 수 없다. 첫 마을 아파트에서 조치원 고대와 홍대에 이루는 시내직통버스가 없어 대학은 물론 군청의 취득세나 여권발급 등 민원업무의 불편은 뻔하다.
조치원의 공동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세종시의 관문이 되도록 조치원역을 접근이 용이하게 서울 역사처럼 서쪽으로 역사와 도로를 확장해야 한다. 그리고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조치원역의 명칭도 세종역과 읍으로 변경하면 상징성과 함께 이해와 이용의 편리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또 1번 도로활용으로 유성에서 세종정부청사 연기군청 고대 홍대를 잇는 시내직통버스 노선신설과 2017년 도로확장공사를 2012년 사업으로 변경해 신속히 준공해야 한다.
또한 세종대왕을 상징하는 한글 등 국가상징물 공원을 조성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한다면 국가균형발전의 상징성과 함께 나라사랑운동의 발생지가 된다.
따라서 세종시의 출범을 앞두고 조치원 공동화를 방지하고 국가균형발전의 상징적인 관문이 되도록 세종청사 위치변경과 세종역.읍 명칭변경, 서쪽 역사증편과 관통도로 확장신설, 유성-첫 마을-군청-고대. 홍대간 시내직통버스 신설, 1번 도로확장 조기준공, 국가상징물 공원조성 등 설치를 통해 조치원 공동화를 방지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켜야 한다.